1026에 대한 열네개의 기억

10·26에 대한 열네개의 기억(<아직 살아있는 전두환>중)

절대권력이 사라지자, 절대적으로 진공상태가 생겼다. 부정의한 권력이 사라졌다는 점은 1960년 4·19와 1979년 10·26의 공통점이다. 그것말고, 공통점이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한 참모가 적절히 짚었다. “4·19 뒤보다도 상황이 더욱 모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4·19때는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지만 민주당이란 대체 세력이 있었고 따라서 허정 과도내각의 임무는 민주당으로서의 정권 중계라는 분명하고 제한된 성격을 갖게됐습니다. 10·26 뒤는 어정쩡한 상황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시해사건으로 퇴장한 것이지 민중봉기로 몰락한 것도 아니었고 공화당, 유정회, 행정부, 군 등 정권의 하부구조는 그대로였습니다.”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74p

10·26은 전두환 권력투쟁의 출발점이다. 모두에게 그랬던 건 아니다. 누군가에겐 정당한 징벌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사익의 종말이었다. 국민 대다수에겐 뒤늦게 온 민주화의 태동기였다. 권력의 중심 인물부터 재야까지 10·26에 대해 시선이 다 달랐다. 이너 서클 안에서도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증오, 경멸, 안도, 허망함, 슬픔 등의 서로 다른 감정의 필터로 바라본 10․26은, 다층적 사건이었다.

김종필. 당시 유정회 의원. 전 국무총리.
(10월26일)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이태원)음식점으로 보고가 들어왔는데 궁정동 어디서 총소리가 나고 청와대 으서리가 아주 부산하다는 겁니다. 그래 이거 무슨 사건이 생긴 모양이라면서 다들 술도 제대로 마시지 않고 집에 일찍 들어갔습니다. 밤 11시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가슴이 덜컹하더만. 전활 받았더니 박승규 비서관이 울먹이면서 “곧 들어오셔야겠습니다”그래요. “왜 그러느냐”니까 “들어오시면 아시니까 빨리 들어오라”는 겁니다.

그래 가니까 청와대 정문이고 어디고 다 허술해서 검문하는 사람도 없고 서 있는 사람도 멍하니 서있어요. 청와대에 들어가보니 오른쪽 접견실에 탁자를 길게 해 놓고 경호원들이 그 위에 흰 시트를 깔고 있어요. “이게 뭐냐”니깐 경호원들이 대답을 않고 엉엉 울어요. 그때 2층에서 박 비서관이 내려오더니 날 붙들고 또 엉엉 우는 겁니다. “각하가 돌아가셨습니다” “뭐이, 각하가 돌아가시다니!” “조금 전에 병원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처리를 하느라고 늦어지고 있는데 여기로 오시는 중입니다.” 조금 후에 시신이 오셨습니다.

보니까 오른쪽 관자놀이에 총을 맞아 피가 흘렀구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얼굴은 깨끗했는데 아하, 벌써 몸이 뻣뻣해지셨는데…(중략)…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이런 생각도 나고 너무도 엄청나서 눈물도 안나오고! 원래 조그만 분이지만 탁자 위에 눕혀 놓으니까 애기같아요. 이분이 이렇게 사셨구나!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던 분이 숨을 거두니까 이런 데 누우시는구나! 아주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삼김과 노태우-오효진이 추적한 정치현장>(오효진·세종출판공사)254p

박동진. 당시 외무장관.
10월26일 나는 KBS와 ‘한국 외교의 당면 과제’라는 대담프로를 녹화하였는데 9시30분부터 방영된다고 하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박 대통령께서도 충청남도 삽교천의 대방파제 준공식에 참석하시게 돼 있었고 저녁 8시부터는 그 광경이 TV로 방영될 예정이었다.…(중략)…저녁 8시25분경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김계원 비서실장 비서의 전화였다. 급한 용무가 있으니 정장으로 갈아입을 필요없이 곧 청와대로 급행해 달라는 실장의 요청을 나에게 전했다. 화급한 사건이 발생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긴급전화를 받은 나는 혹시 북한 공산군의 무력도발이 있어 긴급대책이 필요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대기중인 차변으로 나는 청와대로 급행했다.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차 안에서 나는 여러가지 추측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본관에 도착했다. 평소에 별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고 매우 평론했다. 현관을 지키는 경호원의 표정도 전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내게 2층 비서실장실로 올라가십시오라는 신호만 할 뿐이었다. 2층에서 만난 김 비서실장 비서들의 표정에도 특별히 위급하다는 인상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나는 비서실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자기 책상 앞에 앉아있는 김 비서실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청와대에 도착한 사람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었다. 옆자리의 긴 의자에는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 그리고 법무장관이었던 김치열씨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이분들도 고개를 수그리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분이 모두 눈을 감고 유구무언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비서실장실의 광경을 본 나는 대통령에게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중략)…

2층 복도에서 구자춘 내무장관을 만났다. 나는 무슨 중대사건이 발생하였기에 이토록 침울하며 왜 비상소집까지 필요하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구 장관은 답답한 표정으로 담뱃불을 붙이면서 응답하기를 “나도 잘 모르겠어.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대”라고만 말했다. 내가 관저를 떠나 청와대로 오면서 차 속에서 상상했던 돌발 사태, 즉 북한 공산군의 무력 도발같은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중략)…구 내무장관의 설명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적지않은 내부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리라는 불안을 느꼈다.
<길은 멀어도 뜻은 하나>(박동진․동아출판사)129p

김용태. 1979년 10월26일 당시 공화당 의원 및 제1무임소 장관
1979년 10월26일 밤 10시경에 긴급 국무회의가 국방부 청사에서 소집되었다. 나는 연락을 받고 국방부로 가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부마사태에 고무되어 북괴가 오판한 나머지 또다시 남침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밤중에 국방부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소집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떻든 국가에 비상사태가 생긴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국방부 회의실에 도착해보니 국무위원들은 몹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통령께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10시에 소집된 회의는 좀처럼 열리지 않고 걱정스러운 이야기로 한숨들만 쉬고 있었다.

이때 국방부장관실에는 김규원 청와대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정섭 정보부 보안차장,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었다. 국무회의에 앞서 최규하 총리, 신현확 부총리, 노재현 국방, 구자춘 내무, 김치열 법무 장관이 사고현장을 확인하고 왔다. 최 총리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라고 거두절미하고 말했을 때 국무위원들은 사연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너무 갑작스럽고 엄청난 일을 당한 나머지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중략)…나는 이튿날 새벽 4시에 집에 돌아와 대성통곡을 했다. 하늘이 원망스럽고 ‘세상에 이런일이 있단 말인가! 국운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하며 울고 울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청와대로 들어갔따. 박 대통령의 시신은 아직 입관도 하지 못한 채 소접견실에 모셔있었다.
<김용태 자서록>(집문당)413p

노신영. 당시 제네바대표부 대사. 전두환 정권 국무총리
제네바에 근무하는 동안 참석한 많은 국제회의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79년에 있었던 세계무선통신 주관회의(WARC)이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주관하에 개최된 이 회의는 ‘무선통신규칙’의 전면개정을 위하여 1959년 이후 20년만에 개최되었으며 154개 회원국 중 142개국과 17개 관계기관이 참석한 대규모 회의였다…(중략)…(북한과)표대결의 어려운 결심을 하여야할 무렵, 박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한참 동안 망연자실하였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새마을 운동을 일으켜 가난을 추방하고 조국근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박 대통령의 서거를 애통해 하면서 나는 7년전 뉴델리 총영사관으로 쇠고기 통조림을 보내주었던 박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생각나 눈물을 흘렸다.
<노신영 회고록>(고려서적)213p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이 나서 그(김재규)에게 또 다그쳤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나의 짜증스러운 듯한 질문에 그는 다시 내 오른손을 꽉 힘주어 쥐며 자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밑으로 몇번 돌린 뒤 “이분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둔중한 충격을 느꼈다.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네, 이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계속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눌러댔다…(중략)…나는 (10월)27일 저녁에 총장공관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 박 대통령의 제단을 마련해놓지 않았다고 공관 관리장교를 호되게 꾸짖었다. 그후 나는 출퇴근 때 꼭 분향을 했다. 그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43p

허삼수.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1979년 10월26일 저녁 여덟시. 막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비상소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비상소집이란다.” 저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오늘 또 밤을 새우시겠네요?” “아무래도 이 시간에 비상이 걸렸으니 안그렇게 되겠나”“전화나 하세요”“알았소” 저는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인사처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계급은 대령. 군인에게 있어 비상소집이란 습관이 되기에 충분할만큼 자주 있는 일인지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부대에 도착해보니 사태는 제법 심상치않은 듯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긴 벌어진 듯한데 대체 그 일이 무슨 일인지를 도무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청와대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태였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듯도 했고 군끼리 모종의 총격전이 있었던 듯도 했습니다. 저는 가만히 앉아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령관께서도 같은 생각이신 듯했습니다. 아뭏든 우리 보안사령부의 핵심요원들은 사령관(전두환)을 모시고 급히 육군본부로 향했습니다. 육군본부에 도착한 얼마 뒤 박정희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중략)…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뒤숭숭하고 답답했지만 시간은 흘러 이미 10월27일 0시를 훨씬 지나고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새벽 무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전화가 전두환 합수단장에게 걸려왔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합수단장(전두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잘 모셔와서 시청옆 안전가옥으로 모셔라.” “네?” 저는 순간적으로 중앙정보부장을 왜 우리가 모시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참모총장님(정승화)지시다.”
<나의 진실>(허삼수·해냄출판사)43p

황진하. 당시 보안사령부 수석부관. 현 국회의원
10월26일 저녁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한 나는 가족들과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큰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는 답십리 집에서 부대로 급하게 복귀하였다. 부대에서는 정확한 사건 파악이 되고 있지 않았다. 얼마 후 전속부관인 손삼수 중위(현 웨어밸리 대표이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령관(전두환)께서 연희동 자택에서 과천 형님댁으로 가는 도중에 청와대 쪽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국방부로 가고 있습니다.” 부대에는 온갖 내용의 정보들이 수시로 쏟아져 들어왔고 보안사 비서실장과 참모장 등 여러 처장이 사무실로 속속 돌아오고 있었다. 참모장 우국일 준장, 보안처장 정도영 준장,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 대공처장 남웅중 장군, 기획처장 최예섭 장군,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 등이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업고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해 왔는데 대통령인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이 박 대통령이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게되었다. 생사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위중한 상황임은 알 수 있었다. 끊이지 않는 전화벨 소리로 사령관실은 소란스럽기까지 했다. 허화평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의 유고가 발생하였으니 동요하지 말고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하라는 말을 할 때서야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알게 되었다…(중략)…이렇게 나는 10·26사태를 보안사에서 맞았고 일련의 과정을 목도하였다.
<황진하 회고록>(도서출판 연장통)154p

존 위컴 주니어. 당시 한미연합사령관.
전화기 목소리는 “암살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습니다. 북한이 서울의 간첩요원을 이용해 혼란을 활용하거나 휴전선에서 공격을 할지 우려됩니다”라고 말했다.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이었다. 평소처럼 덤덤했고 동요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불안이 느껴졌다. 그날은 1979년 10월26일이었고 나는 군 관련 업무로 한국을 떠나 막 워싱턴에 도착한 상태였다. 아내 앤과 함께있었고, 전화가 울린 순간 우리 여행가방은 여전히 버지니아주 마이어 요새의 방문객 구역 웨인라이트 홀 바닥에 놓여있었다…(중략)…그 뉴스는 브라운 장관만큼 나를 놀라게했다. 우리 둘다 업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20여년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 대통령과 면식이 두터웠다. 그때부터 박 대통령은 한국을 아는 그 누구에게든 영원불멸한 고정인물이 되었다. 그는 작고 야위었지만 동시에 권위적이었고 매우 카리스마있었다.
<Korea on the brink>(John Wickham Jr·Brassey’s)4p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
1979년 10월26일 금요일 한국은 조용했지만 긴장감이 감돌았다. 민주화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나는 김영삼과 정치보좌관 클라크와 함께 대사관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길고 우울한 대화는 중간중간 박 대통령이 지방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박 대통령의 전용헬기 소음에 묻혔으며 김영삼은 한국민중이 봉기해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분노에 찬 예언을 했다. 나는 그의 분노를 이해했고, 비록 회의적이었지만 그의 예측을 완전히 일축할 수 없었다. 한국은 실제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나는 박정희 체제에 치명적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날 늦게, 거의 자정무렵, 주한미군사령관 대행 로젠크랜 중장이 전화로 ‘비정상적 움직임’(unusual activity)이 있다고 경고했다. 조금 뒤 수석정보요원 밥 브루스터가 한국군이 계엄령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내가 핵심 직원들을 대사관에 불러모으는 동안 한미연합사령관 대행인 유병현 장군이 로젠크랜과 함께 대사관저로 와서 박 대통령이 살해됐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전해줬다. 유병현은 예방조치로 당국이 계엄령 선포를 계획중이며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상황을 이용말라고 경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William H. Gleysteen Jr·Brookings)53p

이형근. 당시 반공연맹 이사장. 전 육군참모총장.
10월26일 급기야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문의 최초 보도는 우발적인 사고라 했지만 나는 그 보도를 접하는 순간 그 사건이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권력 암투가 빚어낸 참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평소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전부터 왕왕 대통령과 최고의 권력자들이 모인 자리에 여가수와 여대생들이 참석했다는 사실이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당시 박 정권의 몰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따.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부인 육 여사가 돌아간 후 정말 극심한 외로움에 고통을 겪어온 박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 못했던 것은 아니나 일국의 대통령이자 국민의 최고 지도자로서 막상 임종의 자리에까지 술과 여자들을 등장시켰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군번 1번의 외길인생>(이형근·중앙일보사)247p

이만섭. 당시 공화당 의원.
결국 나는 10월27일 새벽 전화로 박준규 당의장으로부터 대통령 유고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순간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지난번 김재규 부장이 나에게 “차지철 때문에 나라가 걱정”이라고 한 말이었다. 대통령의 유고가 차지철 경호실장의 횡포와 강경 정치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한때는 비상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책까지 생각해본 나였건만 막상 현실로 눈앞에 닥쳐오니 걱정만 앞섰다.
<5·16과 10·26-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나>(이만섭·나남)235p

예춘호. 당시 재야. 전 공화당 사무총장 및 국회 상공위원장.
10·26 사태 전야의 사회상은 한마디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폭정을 무너뜨리느냐 민주세력들이 싹쓸이 되느냐하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우리에겐 날이 저물면 오늘은 무사했구나 하고 마음을 놓는가하면 날이 새면 오늘은 또 무슨 일이 터질까 하는 안절부절의 나날이었다. 밤새 일이 벌어졌다. 10·26사태가 발생했다. 쫓는 자나 쫓기는 자나 다함께 놀랐고 ‘설마’할만큼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고라던 발표는 삽시간에 시해로 바뀌었다. 온 거리가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 모든 이목은 숨을 죽이고 보도에만 집중되었다. 국민연합의 상임위원들은 박종태 의원댁에 모여들었다. 워낙 뜻밖의 일이라 누구하나 사태의 진상을 알지 못했다.
<예춘호 재야활동 회고록-서울의 봄 그 많은 사연>(언어문화)52p

양순직. 당시 재야. 전 공화당 국회의원 및 국회 재경위원장.
항거를 계획하면서도 나는 점점 깊은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부마사태 이후의 시국은 4·19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갈 데까지 간 국민들의 감정, 시위진압을 위해 특전사까지 동원되고 있는 상황, 이승만 대통령보다 더 권력에 집착하고 완고하게 변한 박정희 대통령 등 많은 요소들이 4·19보다 더 큰 불행을 가져올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날이 새면 대체 오늘은 어떻게 사태가 전개될지 하루하루가 불안하였다. 부패한 권력은 언젠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는 역사적인 필연은, 예상치도 못한 사건으로 그 필연성이 처절하게 확인되고 말았다. 10·26이 일어났고 유신정권은 한 순간에 종말을 고하였다.
<대의는 권력을 이긴다>(양순직·에디터)223p

이한림. 당시 호주대사. 5·16 쿠데타 진압을 주장했던 전 1군사령관.
“죽는 날까지 우리는 헤어질 수 없다. 마음은 항상 같이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는 각각 최선을 다하자. 비록 일본 군복을 입었을지라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자.” 여섯 조선인 일본 육사 졸업생은 이렇게 굳은 맹세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 생도와 나는 이렇게 맺어진 사이였다. 그가 삐딱하게 나갈 때, 또 좌익사상을 노골적으로 권유할 때, 그리고 남로당 군사책으로 극형을 받았을 때도 나는 사상 이전에 조국을 사랑하던 그때의 우정으로 그를 감쌌다. 그가 불타는 듯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경무대(청와대)포격 운운할 때도, 그가 장성이 된 후에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나에게 제의해 왔을 때도 나는 그를 사직 당국에 고발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그간에 입은 고통과 굴욕을 모두 잊고 싶을 뿐이다. 다만 방공호에서 그의 손을 꽉 잡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때의 박정희를 기억하련다.

탐욕으로 말미암아 저승으로 간 박정희여! 나는 그대의 명복을 빈다…(중략)…호주 주재 대사로 3년이나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청와대에서 미안한지 외무부 계통의 전문을 통해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에 진출케 못해 미안하다는 내용의 전문이 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전문을 받고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무슨 애들 장난 같기도하여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되어 대통령 유고라는 전문을 받았다. 비로소 나 이한림과 박정희와의 얽혔던 사연이 끝나게 된 것이다. 나는 박정희 유고 전문을 받고 즉시 사표를 준비하고 대기했다. 그리고 1980년 3월초 나와 가족은 캔버라를 떠났다.
(<이한림 회상록-세기의 격랑>(팔복원)404p 및 454p

태초에 연재가 있었다

미스테리아 2018년 3월호 기고글.

미스테리아 18년 3월호


“이날 나는 내친김에 현장 주변의 거리 측정을 해보았다. 사건 당일 오휘웅 씨가 다녔던 코스를 따라서, 그것도 그가 말했던 시간대에 걸어보았다. 먼저 숭의동 로터리변에 있었던 불교회관에서 8시 5분에 출발, 약간 빠른 걸음으로 시화상회 자리까지 걸어오니까 8시 15분쯤이었다. 오 씨는 그때 두 씨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인삼주를 한잔 얻어마셨다고 하니 3분쯤 머물렀다고 쳤다. 8시 18분에 칠공주사진관 자리에 갔다.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8시 19분. 여기서 오 씨는 사진을 찾고 두어 마디 대화를 했다니 3분쯤 머물렀다고 쳐서 8시 22분. 다시 시화상회로 오는 길에 군고구마를 샀다니 도보 1분에 지체 시간 1분을 보태어 8시 24분에 시화상회에 도착했다는 얘기가 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조갑제 지음, 한길사 펴냄, 1986년 2판 178페이지)

1974년 12월 아내는 장애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지겨워했다. 끈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두 아이도 함께 죽였다. 내연 관계였던 오휘웅이 공범으로 몰렸다. 사건 직전 날 두 사람이 만난 행적이 빌미가 됐다. 오 씨는 경찰 수사 초기 공범 혐의를 인정했으나 검찰 수사 때부터 부인했다. 아내는 오 씨를 공범으로 지목하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오 씨는 진술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 경찰이 수사 당시 “콧구멍에 물을 붓고 발바닥을 곤봉으로 때렸다”고 했다. 검사, 1∙2심 판사 모두 오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 씨는 1979년 사형됐다. 형장에서도 사법부를 저주했다.

악마는 개념어가 아니라 디테일에 숨어 있다. 살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아내의 주장과 범행 당일 오 씨의 동선이 일치하는지에 숨어 있었다. ‘미세한 1분 1초의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 서른아홉 살의 월간지 기자는 수사 기록에 적힌 오 씨의 동선을 직접 걸었다.

이 월간지 기자가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이며, 조 대표의 책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1986년 출판된 이래 양심 있는 여러 법조인∙언론인들의 전범이었음은, 이제 제법 알려졌다. 진부한 책 소개를 하기 위해 글의 첫 단락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내러티브 논픽션 또는 이야기 논픽션의 지속가능한 생산은 시스템의 산물이다. 과거에 그랬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요즘 이 고민을 하고 산다. 14년의 《한겨레》 기자 경험이 이 고민에 답을 주기보다 질문만 더할 때, 맥주잔을 내려놓은 손은 늘, 이 책을 집는다. 『인 콜드 블러드』(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보다 문장은 심심하고 『마인드헌터』(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 비채 펴냄)보다 캐릭터는 밋밋한 이 논픽션을 말이다. 온전히 한 사건을(살인 사건), 인물(주인공과 조연)에 초점을 맞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취재하고 기록한 이야기 논픽션의 한국적 원형이기 때문이다.

‘논픽션’이라는 단어는 사실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다. 픽션이 아니라는 부정의 개념만 존재한다. 이 글이 고민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의 대세 논픽션인 각종 에세이, 여행기, 맛집 기행 등의 ‘에세이형 논픽션’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특정 시간에 걸쳐 벌어진 행위를 중심으로 취재한 내러티브 논픽션이다. 『논픽션 쓰기』(서소울 옮김, 유유 펴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미국 언론인∙작가 잭 하트의 논픽션 교과서 원제가 『Storycraft : The Complete Guide to Writing Narrative Nonfiction』인 것을 보면, 미국 출판 시장에서 ‘내러티브 논픽션’이라는 단어는 이미 어느 정도 시민권을 얻은 듯하다. 한국에서 논픽션의 동의어로 종종 혼용되는 ‘르포르타주’는 물론 인물 전기나 회고록이 모두 이 장르에 속한다.

사람들은 모두 조 대표가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에 대해 “책을 썼다”고 말한다. 틀렸다. 조 대표는 기사를 쓰고 기사를 책으로 펴냈다. 살인 사건은 1974년 겨울 일어났다. 사형 집행은 1979년 9월13일 벌어졌다. 조 대표는 1983년 1월 알고 지내는 교회 집사로부터 오휘웅 씨가 무죄를 주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취재 착수는 1984년이었다. 조 대표는 당시 《월간조선》 기자였다. 먼저 간단히 취재해 《월간조선》 1984년 9월호(통권 54호)에 ‘추적 취재-물증 없는 사형 집행’이라는 제목으로 30페이지 분량의 기사를 썼다. 추가 취재를 거쳐 1986년 9월 340페이지 분량의 단행본으로 펴냈다.

《경향신문》(1986년 11월 17일치) 은 ‘논픽션 새 文學(문학)장르로 脚光(각광)’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개인의 자전적 얘기나 수기, 사건기록 등을 엮는 논픽션이 새로운 문학 형태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며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썼다. 《경향신문》은 논픽션 공모전을 벌였다. 1970년대 《동아일보》도 논픽션 공모전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일간지 저널리즘은 논픽션을 상찬했으나 스스로 논픽션의 생산 기지가 되려 한 적은 결코 없었다.

무엇이 논픽션 생산 시스템인가. 조 대표가 취재에 착수한 시점이 실제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뒤, 사형이 집행된 뒤 5년 뒤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조 대표는 오래 취재해, 길게 썼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아무리 거듭해 읽어봐도 미국 내러티브 논픽션의 세련된 작법을 참고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톰 울프가 1970년대에 주장한 ‘장면 취재’ 기법[i] 등이 엿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휘웅이라는 캐릭터는 살아 있다.

1975년 7월 《동아일보》는 오휘웅 씨 사형선고를 판결 기사 단신으로 보도했다. 두 문단의 단신 속에서 독자는 오휘웅에게 감정이입할 수 없다. 단신 속 오휘웅은 서른 살 남성일 뿐이다. 독자는 실루엣만 보고 소개팅을 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하는 사람과 같다. 조 대표의 논픽션 속에서 오휘웅은 ‘’일련정종’이라는 일본불교 소수종파의 신자이자 블루칼라이며, 말이 어눌했고 대찬 성격이 아니고, 중키의, 고문에 취약한 한 나약한 인간’으로 독자의 눈앞에 다시 그려진다.

스토리텔러들의 어법으로 말하면 오휘웅의 캐릭터가 잡힌 것이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골방에 있는 작가가 상상으로 포착한 게 아니라 발로 뛰는 기자의 팩트로 포착 가능했다. 조 대표는 톰 울프를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011년 인터뷰 때도 조 대표는 내게 톰 울프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삶의 조건(individuals’ status-life)’을 취재하라”는 톰 울프의 테제를 본능적으로 구현했다. 톰 울프는 논픽션 작가들에게 상투적인 신문 취재를 넘어, 취재 대상의 말투, 취미, 종교, 옷 입기까지 취재하라고 권했다.

오래된 지인의 표현을 빌면, 내러티브 논픽션은 일간 저널리즘이 육포로 만들어버린 사람과 사건에 습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시간과 돈이 걸린다.

과거에는 주·월간지와 출판 시장이 내러티브 논픽션의 생산 소비 시스템이었다. 머릿속에서 ‘극우’나 ‘조갑제’라는 단어를 지워야 한다. 조 대표가 월간지 기자였고 월간지의 호흡에 맞춰 취재하고 글을 썼다는 월간지 시스템을 기억해야 한다. 잡지의 시대였고 활자의 시대였다. 1986년 《매일경제》 보도를 보면, 《신동아》, 《월간조선》, 《마당》 등의 종합시사교양지가 32만 부 팔린 것으로 한국잡지협회는 추산했다. 종합시사교양지는 대부분 시사월간지였다. 1인당 국민 소득이 2742달러(241.6만원)였던 1986년의 가난한 한국민들 중 30만 명이 3000원~4000원의 시사월간지를 사서 읽었다. 1986년 영화 관람료가 2800원 수준이었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1판은 3600원이었다.

과거 저널리즘의 위계 속에서 주·월간지가 가진 독특한 위치도 고려해야한다. 쓰는 것이 우선인 기자가 생존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다. 조지 오웰이 평생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욕망을 글쓰기에서 결합하려 했던 것처럼, 실수로 머리에 박힌 생선가시같은 작가적 욕망을 저널리즘 본업과 결합하려 한 기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곳이 주월간지였다. 반면 일찌감치 ‘데스크’가 되어, 쓰기보다 첨삭하는 언론 기업의 간부가 되려는 엘리트 신문기자들은 주·월간지 근무를 꺼려했다.

미국∙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태초에 책이 아니라 연재가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 책을 썼다”고 말하는 사람과 ”트루먼 커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 책을 썼다”고 말하는 사람은 틀렸다. 그들은 책을 쓰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는 1963년 논픽션과 문학잡지를 표방한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나치 전범 아이히만 재판 취재기를 연재했다. 그게 논픽션 책이 되었다. 트루먼 커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도 《뉴요커》 연재 기사였다.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체르노빌의 목소리』(김은혜 옮김, 새잎 펴냄)는 논픽션이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평생 신문과 문학잡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의 원작은 책이 아니다. 월간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 연재된 기사였고, 기자 마크 보든은 훗날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

한편 잡지 연재 이외에 출판 시장이 논픽션의 공장 역할을 수행했다. 르포르타주의 고전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은 오웰의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당대 영향력이 컸던 출판그룹 ‘레프트 북클럽’의 의뢰로 상당한 취재비와 원고료를 받고 취재와 집필을 했다. 이 북클럽의 회원은 30년대 후반 5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고 알려졌다.

“누가, 왜 내 논픽션을 읽는지 고민하기보다, 먼저 좋은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가나 논픽션 작가는 저주받으라. 한국 문학가와 기자들이 ‘번역된 한권의 책’으로 소비하는 내러티브 논픽션의 상당수는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관광지에 세워진 성스러운 문학의 기념비가 아니라, 광장과 시장에서 생활인들이 쓰던 벽돌과 바닥재였다.

그런데 지금, 논픽션 공장들이 문 닫고 있다. 내러티브 논픽션 시장의 공장이 되어주던 주·월간지와 출판 시장 모두 어렵다. 2000년대 초반의 웹PC 물결과 그 몇 년 뒤 들이닥친 모바일 파도가 공장을 다 쓸어갔다. 미국과 일본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본 논픽션 월간지 《G2》의 폐간은 상징적이다. 고단샤가 2009년 ‘논픽션 미디어’(ノンフィクション メディア)를 표방하며 창간했다. 창간사를 통해 미국 주간지 《뉴요커》를 지향하겠다 했다. 진보적 관점에서 이슈들을 다뤘다. 논픽션 작가가 외국인 노동자와 저임금 일본인 노동자들이 합숙하는 하우스셰어에 한 달간 같이 살며 그 체험을 기록한 르포, 로망 포르노 감독의 촬영 현장 르포 등 꽤 좋은 기사들이 많았다. 그런데 2015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지속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휴간했다. 지난 해 만난 《G2》의 마지막 편집장은 “아직은 복간 계획이 없다”고 했다.

《G2》는 2015년 5월 ‘휴간호’에서 왜 본인들이 실패했는지를 특집 기사로 다뤘다. 그중 30대 초의 남성인 어느 경제 전문 웹 매거진 편집장에게 기고를 부탁했는데, 이 편집장은 기고문에서 본인이 본 《G2》에 대해 “행인이 없는 길가에 만들어진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비유했다. 2016년 초 고단샤 본사에서 만난 아오키 하지메(青木肇) 전 편집장은 내게 “지금 돌아보면 고급 레스토랑 음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논픽션은 물론 한국의 모든 활자시장∙매체가 처한 상황이다. 희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미 유명한 사람이 쓰는 논픽션 말고, 무명의 작가가 좋은 논픽션을 쓰고 좋은 대가를 받아 다시 좋은 논픽션의 생산으로 이어지는 좋은 활자 시장의 전망은, 어둡다.

서로 멀리 떨어진 등대처럼, 몇몇 동업자들이 희미하게 희망의 빛을 쏜다. 그 빛을 바라보면재심 전문 실화를 쓴 박준영 변호사와 박상규 작가의 스토리펀딩 연재[ii]도 보이고, 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평전잡지 《바이오그래피》도 보인다.

저널리즘이나 논픽션이라는 단어의 틀에서 벗어날 때 희망의 빛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어는 ‘실화’다. 말장난 같지만, 논픽션은 지지부진한데 실화는 대세다. 퓰리처가 근대 신문 산업을 창조한 뒤 백 수십 년간 저널리즘이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다룬 이야기’의 대표 장르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진짜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라는 질문에 대해 점점 더 다양한 종류의 설명을 원하고 있다. 실존인물,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느는 것은 단적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마인드헌터>는 그냥 나온 작품이 아니다. ‘정통 르포나 논픽션’은 노동문제 등 진보적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뤄야 한다는 낡은 강박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백 수십 년 전에 퓰리처가 자사의 《더 월드》 기자들에게 “디킨스가 되어라”라고 한 말은, 도리어 지금 울림이 있다.

오해가 있다. 과거 한국에서 ‘실화’라는 단어는 ‘팩트를 각색·가공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대사를 상상으로 지어낸 방송사 라디오 다큐가 예이다. 21세기 한국의 실화는 팩트에 기반한 정통 논픽션을 지향해야 한다. 영화의 원작 논픽션 『머니볼』(마이클 루이스 지음, 김찬별· 노은아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이나 『블랙 호크 다운』(마크 보든 지음, 황보종우 옮김, 청아출판사 펴냄), 『마인드헌터』를 읽어보면, 상상으로 지어낸 대목이 없다. 그러나 재미있을 수 있다. 소설가는 사건의 캐릭터, 장면, 행동을 창조하지만, 논픽션 작가는 캐릭터, 장면, 행동을 취재한다.

지난달 설립된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는 이 명제를 생각한다. 독자들이 종이책뿐만 아니라, 모바일 등 다양한 형태로 논픽션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앞서 어떤 지점에 다다른 동업자들이 비춰주는 서치라이트의 도움을 받고 있다.

이제 ‘논픽션 매니페스토’를 쓰려다 ‘구조 신호’에 머문 이 글을 마칠 때다. 그것이 ‘충성고객이 찾는 맛집’인 《미스테리아》 지면에 누를 덜 끼치는 일일 테다. 내러티브 논픽션의 생산 시스템을 새로 찾는 일은 유기농산업의 탄생과 비슷하리라고 팩트스토리는 생각한다. 유기농을 재배하는 농부와, 약간 더 비싸지만 몸에 좋은 유기농을 사는 소비자가 함께 태어나는 과정일 것이다. 올해 상반기 안에 팩트스토리는 실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때 《미스테리아》에 모인 작가나 독자들에게도 유기농 논픽션의 농부나 한살림 회원이 되어달라고 청하려 한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상찬하기는 쉽다. 중요한 것은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가 만들어졌던 구조다. 구조를 생각한다.

글: 고나무,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 대표. 스토리펀딩 ‘지존파 납치생존자의 증언’, 『아직 살아있는자 전두환』 작가.

[i] 톰 울프는 내러티브 논픽션을 쓸 때 영화 시나리오처럼 장면 구성(scene by scene construction)을 기본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ii] 이 연재물은 『지연된 정의』(박상규·박준영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다.

매거진 창간 참고사이트

한국잡지순위

2015(201307-201406)+잡지전문지+정기공사+일람표

참고자료

지정 2011-04 잡지산업 활성화 방안 연구

레퍼런스 해외잡지

고단샤 g2

2008년 기준 전년대비 발행부수 증가잡지 39개. 106개 감소.

30대 여성 타깃. 宝島社 雑誌 inred

20대 여성 타깃. 宝島社 sweet

경제잡지 週刊東洋経済 週刊東洋経済  週刊ダイアモンド

 

 

 

 

토요판 글쓰기 강의 보조자료-Tom Wolfe의 new journalism에 대한 에세이

7.6 저녁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토요판팀이 돌아가면서 하는 토요판기자들의 글쓰기 강좌에서 3강 ‘이야기 논픽션쓰기 맛보기’를 맡았다. 오래전부터 번역해서 소개하려던 Tom Wolfe의 <New Journalism> 일부를 드디어 발췌 번역해 수업 보충교재로 썼다. 그전에도 번역해 수업교재로 쓸 기회가 몇번 있었지만, 문체가 너무 섬세, 화려하고 중문, 복문이 많고, 블랙유머 가득한 문체라, 번역이 고역. 미뤄왔던 이유.

2007년 esc시절 Tom Wolfe의 이 앤솔로지(이 책은 톰 울프의 짧은 서문과 그가 뽑은 좋은 논픽션의 앤솔로지로 구성돼있다)를 처음 읽고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미국 기자들은 지금 한국 뉴스룸의 논쟁을 40년전에 했구나’라는 사실에. 미국 기자들이 천재여서가 아닐 것이다. 글쓰기 시장이 넓어서일게다.

톰 울프의 핵심 주장.

1. 19세기 발자크, 디킨스 등의 사실주의 소설이 했던 역할을 20세기(와 21세기)에는 뉴저널리즘이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2. 여전히 한국 신문편집국에 널리 퍼진 오해. 문체 실험=1인칭. 1인칭 자체가 혁신 아니다. 기자가 1인칭으로 쓰는 거 자체를 대단한 문체실험으로 보는 것, 자체가 신문 편집국이 표현하기, 글쓰기에 무지하고 관심없음을 보여주는 지표. 1인칭은 필요하면 쓰면 된다.

1인칭으로 쓰더라도 1인칭 화자가 주인공이면 안된다.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길,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읽은 재밌는 1인칭 논픽션은 다 주인공이 따로 있었다. Hunter Tompson의 Hell’s Angels 나 Norman Mailer의 The Fight 은 자의식 가득한 1인칭 문장으로 쓰여졌지만, 결고 화자가 주인공이 아니다. 헬스 앤젤스의 주인공은 단연 당시 폭주족인 헬스 앤젤스,이고 더 파이트의 주인공은 무하마드 알리이다.

가끔 1인칭 화자가 주인공인데 재밌는 논픽션이 있다. Black like me 처럼. 기자가 흑인으로 변장해 보수꼴통 남부주를 여행했다. 1인칭 화자인 기자가 모종의 ‘액션’을 이끌어내는 것이 재미의 대전제. 결론은, 그냥 자의식만 드러내는 건, 혁신도 아니고, 재미도 없다는 것.

1인칭 문장=혁신,이라는 착각 때문에 내러티브 저널리즘이 과도하게 비난받는다. 재밌게도, 이런 착각, 오해, 비난, 논쟁 등, 지금 한국 신문편집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40년전에 미국에서 있었다.

3. 내러티브 저널리즘=1인칭으로 쓴 문학같은 기사. 톰 울프는 이 오해에 대해 가장 크게 비판. 진짜 뉴저널리즘의 역작들은 3인칭 작품들이라고 지적. 맞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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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기자들의 유혹하는 글쓰기 2기-3강 <서사형 기사부터 논픽션까지> 참고자료

◆이야기 논픽션 보조자료

New Journalism (Tom Wolfe·Picador·1975)에서 부분 발췌

  1. 초창기 소설의 문학적 지위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그가 발명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논픽션 소설(the nonfiction novel)’이라고 주장했을 때, 내 머리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건 익숙한 ‘아!’ 하는 감탄의 섬광이었다. ‘아! 아주 명민한 필딩(Fielding)식의 전략이군!’ 헨리 필딩이 그의 첫 소설인 <조셉 앤드루스>를 1742년에 출간했을 때 그는 그 책은 소설이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발명한 문학장르인 ‘희극적 산문 스타일의 서사시(the comic epic poem in prose)’라고 주장했다. 그는 <톰 존스>에 대해서도 똑같이 주장했다. 필딩은 그의 책을 지금은 사라진 고대 그리스의 희극 서사시인 <마르기테스>와 비교했다. 필딩의 주장은 물론-그리고 223년 뒤 카포티가 한 똑같은 주장은-자신의 작품에 당대의 지배적인 문학 장르의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문단(literary people)이 자신의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필딩의 시대에 지배적인 문학장르는 서사시나 고전적인 시극(verse drama)였다. 소설의 문학적 지위는, 마치 1965년에 카포티가 ‘뉴 요커’에 <인 콜드 블러드>를 연재하기 시작했을 당시 주·월간지 저널리즘(magazine journalism)의 낮은 지위가 낮은 것과 매한가지로, 낮았다.

이와같은 ‘아!’하는 깨달음 덕분에, 나는 재밌는 것을 인지하게됐다. ‘뉴 저널리즘’의 초창기 모습은 영국에서 사실주의적 소설(realistic novel)의 초창기와 똑같다는 것이다. 문학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이다. 나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모호한 말을 반복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데자 뷔’처럼 아주 정확한 디테일까지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18~19세기 소설 문학에 대한 반발이 뉴 저널리즘에도 반복된다. 소설에 대한 반대든 뉴 저널리즘에 대한 반대든, 반발을 사는 새로운 문학 형식은 ‘피상적이다'(superficial), ‘수명이 짧다'(ephemeral)’, ‘그저 오락물(mere entertainment)’, ‘비도덕적이다(morally irresponsible)와 같은 평을 받는다. 19세기 소설에 대한 반대의견과 20세기 뉴 저널리즘에 대한 반대의견 중에 어떤 것은 너무 비슷해서 묘한 느낌마저 준다.”

  1. 신화 vs 리얼리즘

“17세기~18세기 영국에서 사람들이 시에 대해 가진 생각처럼, 소설이 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인식을 주는 정신적 기능을 한다는 생각이 지금 문학계에 보편적이다. 1972년 소설가 챈들러 브로사르는 ‘진정한 소설은 환상이며 픽션 작가는 선지자(visionary)이다’라고 썼다. 마크 머스키는 1970년대 ‘새로운 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우리는 미국의 귀가 이야기에 귀를 닫고, 신화와 우화, 패러독스에 귀 닫았다고 생각지않는다’고 헨리 데이빗 소로를 인용하며 주장했다. “신화에서는 초인적인 지성이 인간의 무의식을 사용한다’고 그는 썼다.

수백년동안 소설을 지배적인 문학 장르로 만들어온 소설가의 정신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실은, 그들은 환각 속에서 진짜 신화와 우화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다. 고전적인 운문, 프랑스와 이탈리아 법정 문학이라는 존경받는 전통으로서의 신화와 우화말이다. 현대의 시각으로는 초창기 소설이 얼마나 리얼리즘에 충실했는지 알기 어렵다. 리얼리즘을 위한 리얼리즘! 이 모든 것은 삶에 대한 것이다. 다니엘 데포는 난파선의 선원으로서 자신의 진짜 회고담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썼다. 리차드슨은 자신을 정부로 삼고싶어하는 어떤 남자의 수중에 갇힌 한 실제의 여성을 <파멜라>에서 구현했다. 슬로우 마을에서, 마을사람들은 <파멜라>를 낭독하던 대장장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대장장이는 파멜라가 자신을 좋아하던 남자와 결혼하고 두 남녀가 교회 종을 울리며 축하하는 소설 대목에 다다른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비평가들은 일상적으로 소설의 축자적 사실관계(literal accuracy)를 체크하곤했다. 마치 그 축자적 사실관계가 광고에 보장된 것이거나 혹은 작가가 지켜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흡사 요즘 영화 관람객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 제작자에게 ‘이 영화가 30년대 갱들을 다룬 것이라면, 어떻게 주인공이 1941년형 플리머스가 주차된 수족관에서 총을 맞을 수 있죠?’ 따위의 항의 편지를 보내는 것과 같다. 당시 소설가들은 썩 내키지않았지만 불필요한 발품팔기 취재, 즉 ‘파헤치기(digging)’를 일상적으로 했다. 말 그대로 정확하게 쓰기위해서. 취재는 소설쓰는 과정의 일부였다. 찰스 디킨스는 작품 <니콜라스 니클비>를 쓰기위해 필요한 사실(material)을 얻기 위해서 친구의 아들을 찾는척하면서 가명을 써서 악명높은 요크셔의 기숙학교들을 세군데 이상 찾아다녔다.

디킨스나 발자크 같은 사회적 사실주의 작가들은 순수하고 단순하게 리얼리즘 그 자체를 즐겼지만 그런 취향이 그들의 커리어를 가로막기도했다. 둘다 살아 생전에는 예술가로 대접받지 못했다. (발자크는 심지어 당시 프랑스 아카데미에 초청받지도 못했다.) 1860년대 이후, 소설가뿐 아니라 비평가를 포함한 문학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리얼리즘은 강력한 도구이긴한테 그것이 고차원의 현실이나, 우주적 차원, 영원하 가치, 도덕적 인식, 그러니까 문학이 영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그 전통, 즉 신화, 우화 등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하찮은 것이라는 그런 이론을. 1920년대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벌써 사회적 사실주의는 저물기 시작했다.

대공황이 미국 소설의 사회적 사실주의를 자극해준 덕분에, 유럽의 유럽 문학의 ‘신화 문학 유행’은 다행히 2차대전까지 미국 문학계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강해지고 있다. 거의 모든 진지한 미국 작가들은 죄다 대학 졸업자이고 대학에서 그들은 베케트, 핀터, 카프카, 헤세, 보르헤스, 자마친 등을 배운다. 영문모를 난해한-문단(fraternity)바깥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종류의 소설 작품들이 나오는 게 그 결과다. 인물은 개인적 배경이나 개인사가 없으며, 사회적 계층, 인종, 국적 등은 하나도 언급되지 않고, 구체적인 이름도 없고, ‘숲”택지”사막”산’ 또는 ‘바다’처럼 시간성이 없는 공간에서 운명에 이끌려 행동하곤 한다.”

“나는 이들 ‘신 우화주의자들(neo fabulist)’의 무의식적 전략이 다음과 같은게 아닐까 생각한다. ‘리얼리즘은 뉴 저널리스트들에게 선취당했고 우리는 그들과 경쟁하기 어렵다. 그런데 리얼리즘은 해묵은 것(old hat)이다. 그러므로 내게 남은 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스토리텔링, 문학이 태어났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신화, 우화, 전설!’….(중략)…리얼리즘 소설의 도구들을 포기함으로써-사실적 대화, 계층을 드러내는 사실(status of life), 시점 등-‘신 우화주의자들은 ‘전기가 (발명된지)오래 됐기 때문에’ 전력을 포기한 전기기술자처럼 되어버렸다.”

  1. 뉴저널리즘은 정말 새로운가?

“뉴저널리즘을 쓰고자하는 많은 기자들이, 창작 기술적 어려움을 해결하기위한 목적으로 ‘내가 거기 갔고, 이것이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와 같은 일인칭 문장(autobiographical format)을 사용한다. 뉴 저널리즘은 종종 ‘주관적’ 저널리즘으로 특징지워진다. 리차드 쉬켈은 ‘코멘터리’에서 뉴저널리즘을 작가가 자기 자신을 늘 무대 중앙에 두는 문학 형태로 이해된다’고 평했다. 실은, 뉴 저널리즘의 최고의 작품들은, 카포티, 게리 테일리스, 브레슬린, 색, 존 그레고리 던, 조 맥기니스처럼, 작가가 철저히 자신을 숨기는 3인칭 시점에서 쓰여졌다. 1960년대 저널리즘의 ‘주관성’ 개념은 다른 쪽에서 또한 생겨났다. ‘뉴 저널리즘’이라는 용어는 ‘편들기 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과 종종 혼동됐다. 신좌파의 부상과 더불어 문학 기술적으로는 구닥다리에 해당하는 ‘빌리지 보이스’의 잭 뉴필드가 자신을 뉴저널리스트로 부르는 것을 보게됐다.”

  1. 리얼리즘의 생리학

“활자는 필름이나 연극무대처럼 이미지나 감정을 창조하기 보다 독자의 기억을 건드리는, 간접적 매개체다. 가령, 술취한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묘사할 때 작가는 취기 그 자체에 대해 쓰지 않는다. …오직 4개의 도구들만이 독자의 기억을 풍부하게 건드릴 수 있다. (글을)장면(scene-by-scene)으로 글 구성하기, 대화, 시점, 그리고 사회적 삶 묘사하기(detailing of status life). 장면 구성과 대화는 활자 작가보다 영화감독이 더 잘 구사한다. 그러나 시점과 사회적 삶의 묘사는 필름보다 활자에서 더 잘 구현된다. 어떤 영화감독도 인물의 마음속으로 관객을 데려가본 적이 없다. 영화감독들은 별걸 다 해봤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시도했다. 카메라를 주인공의 ‘시점’으로 삼기도했다. 요즘 유행은 메모리 플래시(플래시 백)이다. 그 어떤 것도 영화 속 인물 속의 머릿속으로 당신을 데려가주지 못했다. 어떤 사실주의적 소설들은 매우 성공적으로 주인공의 정신적 삶과 정서적 분위기를 구현했다. 가령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처럼. 이런 소설들은 종종 이 소설들을 영화하는 감독들에게 재난이 된다.”

  1. 취재(reporting)

“신문 기사를 위한 취재에서 이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으로 옮겨가려는 사람은, 기본적인 취재 단위(basic reporting unit)은 더이상 자료나 정보가 되지 못하며 장면이 기본적인 취재 단위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는 산문의 복잡한 글쓰기 전략의 대부분이 장면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포터로서 당신의 중요한 과제는 당신이 취재하고자하는 장면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만큼 충분히 오래 취재원옆에 머무를 수 있느냐다. 다른 취재 비결이나 장인의 취재 비법같은 것은 없다. 이건 순전히 기자의 품성에 대한 시험이다. 취재는 당신이 취재를 많이 해봤다는 이유만으로는 결코 더 쉬워지지 않는다. 최초의 문제는 늘, 생판 남에게 접근해서 그들의 삶에 접근하고 당신이 답을 들을 권한이 결코 없는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고, 당신이 애초 보도록 되어있지 않은 것들을 청해서 보는, 그 모든 것들이다.”

새털뉴스3 –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의혹 취재 후기

“위인이나 영웅은 다만 존재하는 것만으로써 수십년,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사람들의 정신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인 면에서뿐이다. 실제생활에서나 정치라는 힘의 영역에서 그것이 좌우하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이 사실은 모든 정치적 믿음을 경고하기 위해서 강조되어야한다. 거기서는 뛰어난 인물, 순수한 관념의 인간이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일은 드물고 오히려 가치는 떨어지지만 교활한 족속의 인간, 즉 흑막의 인간이 결정권을 쥐는 경우가 많다…(중략)…나폴레옹이 이미 100년전에 말한 바와 같이 정치라는 것이 현대의 숙명, 새로운 운명이 되어버렸다면 우리들은 자기방어를 위해서 이들 힘의 배후에 숨어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위험한 힘의 비밀을 알려고 노력해야한다.”

독일의 소설가,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제가 ‘문제적 인간’에 관심많은 이유입니다. 지적 허세스럽게 표현했지만,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 승리하는 나쁜 남자 또는 여자’에 관심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취재는 이런 논픽션 작가로서의 개인적 관심사는 접어두고, 오로지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의혹의 점검과 분석에 집중했습니다.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과 합당해 대선을 치렀던 어떤 인물이 자살합니다. 그가 남긴 메모에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대선 캠프의 핵심 인사 이름이 거론됩니다. 잘 벌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6월18~19 및 22일 삼일간 의정부에 다녀왔습니다. 10여명에게 전화하고 5명정도 만났습니다. 취재포인트는 세가지입니다. 첫째 ‘아버지 홍우준 전 민정당 의원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아는 사이였을까’가 핵심 취재 주제였습니다.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메인기사 홍문종이 사는 법 입니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입니다.

홍우준-헌정회

둘째 그가 과거부터 검찰 수사를 피해왔던, 운 좋은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아버지 홍우준 전 경민학원 이사장 횡령 유죄, 기사입니다. 지역신문 단신입니다. 의정부 지역 현지 취재를 해보니, 아들대신 아버지가 기소된 사건,이라 수군대더군요. 이때 기억해야할 것은 ‘의정부지검은 수사지휘를 잘 했는가’입니다. (저는 ‘검찰’이라는 주어를 싫어합니다. 홍 의원을 수사했던 바로 그 검사,를 떠올려야합니다. 지금 홍 의원과 관련한 보도들을 보며 그 검사님, 무슨 생각을 하실까요?)

셋째, 제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관심많은 인간 분석입니다. 홍문종 의원은 2세 정치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 지역에서 민정당 소속으로 2선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민정당을 해서 미리 선악을 선 그으면 안됩니다. 지금 반한나라 성향의 독자들도 좋아하는 남재희 전 장관도 민정당 의원을 했습니다. 윤여준 전 장관은 5공 때 청와대에서 일했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활동을 했느냐입니다. 아버지 홍우준 전 경민학원 이사장 기사입니다. 현대사 전공자라면 홍우준 전 경민학원 이사장의 자서전(구술을 작가가 정리했습니다) 새총으로 무지개쏘기 를 흥미롭게 읽을 겁니다. 반공개신교인, 목사, 부동산 투자가(사실 투기에 가깝죠), 인맥관리의 달인 등, 어떤 의미에서 시대를 ‘여러 얼굴로, 독하게’ 살아낸 어느 반공세대의 – 약간 씁쓸한 – 초상이 있습니다.

베일의 기업, 일베 취재후기

1. 지방 남중 남고 나왔다. 당연히, 욕이 일상이었다. 92년에 고교1학년, 94년 전쟁위기때 고3. 96년에 대학갔다. 98년에 군대로 도망갔는데, 많이 맞기도했고, 가끔 때려보기도했고, 욕은 진짜 많이 했다. 아,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니까 욕은 아마 30중반까지는 한국 남자들에게 일상일 게다.

성기를 가리키는 순우리말 단어를 섞은 욕은 압도적으로 군에서 많이 들었다. 가장 창발적?인 욕은, 훈단에서 들었다. DI(Drill Instructor)들은 훈병이 웃는 모습을 보면 “이 새끼가 날아가는 참새 *지를 봤나, 왜 실실 쪼개”따위의 표현을 썼다. (물론 말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 두달간 거의 매일 접속한 일베는, 적응이 안된다. 내가 딸을 낳은 아빠여서인지 모르지만, 매우 거북하고 어둡고, 습한 정서적 느낌을 주는 일베의 욕 문화가, 나한테는 재미없다. 그러니까 ‘보*아치”자궁에 김치”자궁떨리노’같은 표현에 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는 말인가. 사회학자들은 저런 포스팅에 대해 ‘trolling’ 등 ‘모종의 재미’로 설명하거나, 그도아니면 ‘표현의 자유’로 – 정서적으로 멀찌감치 물러나 – 방관한다.

어쨌든 나는 거북했다.  경향신문 일베 기획 등 그간 일베를 다룬 기사들이 꽤 있다. 일베 욕 문화에 대해서, 그간 여러 논문이나 언론 기획기사에서 ‘경제 불황기 젊은이들의 인터넷 하위 문화sub culture’라는 규정이 많았던 것 같다. 전두환을 찬양하고 말끝마다 애국, 글끝마다 일부심 어쩌고하는 문화가 어떤 의미에서 서브컬쳐란 말인가. 재미도 없다. 당최 재밌는 애국,이란 있기 어려운 것을.

주체의 측면에서도 저런 규정은 현실의 일베와 맞지 않다. 궁금한 분은, 당장 구글에 ‘일베 학력 인증 대란’을 쳐보시라. 일베 회원이 올린 프린스턴 학생증을 볼 수 있다. 비정규직도 아니고, 부자집 아들로 추정되고, 많이 배운 젊은 남자 아이들이, ‘자궁떨리노’같은 아이디로 진보적 정치성향, 여성, 사회적 약자, 조선족, 노무현에 대한 분노를 배설하고 심지어 현실밖으로 걸어나와 대자보를 찢어버리는 곳이 일베다. 최근 논란을 사는 일베 헤비 유저로 알려진 KBS 기자직 신입사원의 아버지는, 공기업의 정직원이다. 안정적인 중산층 출신 젊은 남자 아이인 일베.(*sirylcat님 지적에 따라 글 수정…) 이런 실체를 비교적 잘 규명한 게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기사. 시사인 일베 기획

2.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64371817&orderClick=LEA&Kc= 을 지난해 읽은 뒤, 다뤄보고 싶었다. 고대 박사 일베의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훼손 사건을 취재하러, 팔자에 없이 고대 공대 대학원에 찾아가기고 해봤고, 무튼 삽질 인풋하고 버린 취재가 꽤 많았다. 그러다 기사썼다. 야마는 기업 일베,  주식회사 유비에이치, 전현 운영진 등 세가지. ‘물리적 실체로서의 일베’랄까. 담론 분석은 싹 빼고. (다른 곳에서 꽤 다뤘으므로)

유비에이치 분석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1488.html,

일베 최초 개설주장, 모에명수인터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1420.html

3. 인터넷에서 불쾌하고 공격적인 포스팅으로 관심을 끄는 행위,를 trolling이라 한다. 니찬네루(2チャネル)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일베보다 먼저 생겼다. 개설자 니시무리 히로유키는 이렇게 생겼다. 니찬네루 개설자 니시무라 히로유키.

일베와 크게 다르다. 개설자가 누군지 모두가 알고, 개설자는 트래픽을 끌어모은 결과를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다른 기업에 돈받고 팔았다. 보수나 극우로 욕하는 것은 차치하고, 일단 이게 커뮤니티의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상업화 과정. 일베는, 최초 개설자, 과거 운영진, 현재 운영진, 상표권자, 현 상표권자인 주식회사 유비에이치, 이 모두가, 전부, 베일에 가려져있다. 일베는 매달 돈을 내고 SK브로드밴드와 KT의 기업용 서버 상품을 쓰는 사기업이다.

4. 취재의 최종 목표는 ‘전현 운영진의 실체 알리기 및 접촉’이니, 결과적으로는 절반은 실패한 취재. 남은 건, 일베ILBE라는 상표권의 상표권자였던 ‘박마이클용’, 2011년에 ilbe.com도메인 점유자로 갑자기 등장한 Micheal Park, 서울시내 종합병원 의사 박아무개의 관계 입증. 일단 박마이클용=Micheal Park은 입증.

키프리스에서 상표권 조회를 할 수 있다. 검색어에 일베,와 일베저장소를 치면 현재의 일베와 관련해 3개의 상표권을 소유한 박마이클용,의 이름이 나온다. 이자가 등록한 상표권은, ‘일베ILBE’와 ‘일베저장소’다.

trademark2

누구든 볼 수 있다. 박마이클용,은 2013년에 일베의 상표권을 주식회사 유비에이치에 양도한다. 돈을 받고 판 것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조선닷컴 일베 기사 보면, 2013년에 12억에 팔았다,고 알려져있다. 오보의 가능성이 있다.  일베 웹마스터 스브스 그알에 답변, 에서 일베 웹마스터는 매각을 부인. 그렇다면 박마이클용,은 돈도 받지않고 상표권을 유비에이치에 넘겼다?

박마이클용-도메인등록-최초기록-2011-2

구글에 domaintools를 치고 들어가시라. 거기서 ilbe.com치면 그 도메인의 history가 나온다. (도움말씀 주신 IT 관계자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ㅎ) 보이시나. Micheal Park. ilbe.com도메인 최초 생성은 2003년. 현재의 일베와 전혀 무관하며, 아마 단순하고 발음하기 좋은 도메인이므로, 당시 미국 기업이 무턱대로 점유 선점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부터 계속해서 locked상태.

그러다 2011년 2월, 갑자기! 서버가 active된다. 즉, 저 도메인이 한국의 일베사이트와 연동된다는 의미. 등록자(도메인 점유권자)이름이 갑자기 바뀐다. 마이클 박. 상표권자 박마이클용과 Micheal Park의 사당동 주소가 정확히 일치. 남은 건, 박마이클용(=Micheal Park)과 의사 박아무개씨의 관계 밝히는 것.

5. 08년에 한창 초짜 기자 시절이라, 디시인사이드질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일베를 잉태한 09년~2010년 디시인사이드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같은 사람은 구글에 http://archive.org/web/를 치시라. 거기 dcinside를 치면 예전 모습이 나온다.

보이시나. ‘일,베,로’라는 댓글들. 일간베스트 게시물,도 이미 저 때 다 있었다. ‘ㅈ ㅗ ㅈ’ 이라든가 ‘보*’같은 막말문화도 엿보인다. 일단 게시글 목록을 본 인상비평은, 태동기의 디시 일베와 현재의 일베는, 성적인 글, 욕설 등 막말문화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2008-디시코갤-일베-2

그러나 결정적으로 과거 일베는 현재 일베와 ‘정치성’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는 느낌. 현재의 일베는, 과거 디시 일베가 모태라기 보다 사실상, 극보수화된 과거 디시인사이드 정사갤이 업그레이드된 느낌.

2008-디시코갤-일베-4 2008-코갤운영자공지-삭제기준

디시 일베 게시글중에, 삭제된 것만 모아놓은 게 애초 일베였다. 최초 개설자 모에명수는 현재 민사소송중이다. 자신이 09년에 만든 ‘원조 일베 저장소’를 ‘새드’가 모방해서 ‘ilbegarage’를 만들었고 이게 현재의 일베가 됐다,는 주장.

주장의 신빙성은 물론, 이런 괴상한;;; IT 취재의 경우, 지방 도시의 스타벅스 테이블 건너편, 내 눈앞에 앉은 이 청년이 모에명수가 맞는지, 부터가 전부, 취재의 영역이 된다. 취재할 때는, 누구도 믿을 수 없으므로. (뭐…당연한거지만). 본인이 사회적 약자,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고.

모에명수일베-2009-11월12일

이게 모에명수가 제공한 자신이 09년에 만든 일베 화면. 불행히 archive.org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작한 사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10-10월-새드-일베개라지-블로그용

이게 모에명수가 제공한 일베개라지 사진. archive.org 에서 ilbegarage.er.ro를 검색해보니…

일베개라지-2010

나온다. 즉, 모에명수 주장대로 일베개라지는 실존했었다. 모에명수의 일베사이트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쟁점은 ‘모방이 존재했느냐’일 것.

6. 야스다 고이치 형님이랑, 술 한잔 마시고 싶다. (이분 고단샤 논픽션상 수상소감 보니, 주간지 기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일본 기사체, 한국 기사체

1. 총리 관저 드론 공격 시도자 야마모토 야스오는 로운 울프.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689474.html

그의 블로그. http://guerilla47.blog.fc2.com/ 외로운 늑대라는 점에서 김기종씨와 비교할만하지만, 김기종씨에 비하면 훨씬 정상적인 사고를 지녔다는 느낌.

2. 그의 블로그 마지막글 제목은 참고서参考書。여러 책들이 소개돼있다. 중간에 보이시나,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눈에 띈다. 천공의 벌(붕붕 거리는 꿀 빠는 바로 그 곤충 벌). 「天空の蜂」東野圭吾. 단독기사를 많이 쓰시는 중앙일보 특파원 김현기 선배가 먼저 기사화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675874&cloc=olink|article|default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이 소설. 일본에서는 최근 영화화. http://eiga.com/news/20150410/9/

3. 한국의 근대는 대부분 일본의 근대가 이식된 것,이라는 의견에 나도 동의하는 편. 해방이후 미국의 압도적 영향아래서 사회의 많은 영역이 미국식 근대화를 경험했지만, 언론은 아마 일본의 근대가 가장 많이 흔적을 남긴 직역이 아닐는지.

사스마리는, 케이사츠(경찰)警察、마와리(돌기). 周り. 신문 편집부에서 쓰는 거의 모든 용어. 도비라(속표지)는 일본어 扉。인물사진을 배경에서 오려내는 작업. 누끼. 어원은 벗겨내다,라는 뜻의 일본어 누쿠ぬく。그리고 한국 언론이 사랑하는 단어. 관계자. 칸케샤. 関係者。警視庁関係者によると~경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수습때 기사체에 ‘~에 따르면’을 쓰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그래서 한겨레 기자 대부분 쓰지 않는다. 그때 1진은 그 이유에 대해 영어의 according to를 직역한 잘못된 영어 번역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지금 일본기사체를 보면 그 설명이 과연 맞는건지 의문. ‘~에 따르면’에 해당하는 ‘~니 요루토’라는 일어 구문이 있으므로. (`~니 요루토’라는 일어 구문이, 메이지유신때 영어 according to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현이 아니라면, `~에 따르면’이라는 한국어 구문은, 일어에 뿌리를 둔 것일듯)

기타 한국 언론 기사에 종종 나오는 클리셰 표현들에 해당하는 일어 표현들. ‘~明らかにしました。’ 아키라카(명확.밝음)니 시마시타. ‘~라고 밝혔다’. `~불꽃을 튀기다. 히바나오 치라스. 火花を散らす。`~의욕을 보이다. 이요쿠오 미세마스 意欲を見せます。.. 뭐 이것뿐이겠냐만…

저 한국 언론의 클리셰 문구는, 죄다 일본 기사체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새 벚꽃 원산지 논쟁을 보니, 말도안되게 국뽕 맞으신 분들 있던데, 설마하니, 한국 기사체가 원조고 일본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가 따라한 거,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하시는분은, 없겠지.

4. 덤. 후래자삼배,의 어원.

“뭐, 찬 술이라도 돼. 후래자 삼배. 어쨌든 술이 떨어지니깐 손이 떨리고, 이명이 들려서 못 살겠어.” 할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키치를 쳐다봤다.

– 다나카 히데미쓰의 <취한 배>(도서출판 소화) 460p

다나카 히데미쓰. 1913 – 1949. 와세다대를 졸업한 뒤 30년대 중반 고무회사의 경성 지점에서 3년동안 근무. 48년에 식민지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 <취한 배>출간. 49년 스승 다자이 오사무의 묘 앞에서 자살.

요컨대 아직도 한국인들이 술자리에서 외치는 “후래자 삼배”라는 말의 역사가 최소한 70년은 넘는 셈이다. 소설적 재미는 못 느꼈으나, 당시 조선 문단의 뒷풍경을 엿보는 맛이 있다. 노천명, 유진오, 백철 …등등에 대한 묘사들이 나온다.

아직 내공이 모자란 탓에, 일본 기사체 추가 분석글은 나중에 다시.

3.26 김형식 공판 주요 진술

△2015. 3.26 오후 2시 302호 서울고법

김형식 항소심 – 친구여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오후 2시-6시. 중요대목 중심 발췌

#변호인단 프로파일러 증인 신청

재 : 프로파일러 증인이 필요하다 무슨 취지시죠?

변 :청부살인과 달리 극히 이레적인 내부??적 사건. 저희도 범죄학자들에게문의한결과 극히 이레적인 침입한 법죄학적 특징. 외부 침입형 처부살인 사거은 …이사건 나타난 정황ㅇ이 범죄…이해하기 어려운 정황이 존재. 검찰이 주장하는 정신적 종속관계는….범죄심리학에서 검찰이 무어슬 입증해야할 것이 정신적 종속관계가 ..검찰이 주장하는…무엇보다 팽&&이 번복되는 과정에서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고 신빙성 있는지 여러 가지 의뢰결과 이부분에서 재판부가 아실 필요가 있지 않나. 뭣보다 범행 자행하는 유서나 메모에서 대검에서는 진술분석팀이 이싿고 합니다. 과연 피고인 김형식이 시킨것인지 팽이 진정성있게 한것인지 대검 분석관에 의하면 검토되고 조사될 수 있는데도 기본적 조사도 안했습니다 범죄 심리학적 관점에서 하는지 평가할 필요 범행 현장 모습에 대한 분석도 살인교사 현장보다 강도범행으로 보이는 현장적 증거..살인교사 소강상태들이 연속된 범죄심리에 비춰봤을 때 간략히…한 부분이지만 여러 가지 의문 품고있는 정황들은 범죄학적 관점에서 충뿐히 …심리할 때 도움될까 싶어서 이 부분에서 경찰대 외래교수 배성환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

재 : 장황하게 말하게 한 것은…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고 기자들에게 도움이 되라고 한거고 …잘 모르겠어요 피고인측이 주장하는 것은 범죄심리에 기초해서 현장 진술 흔적 종합하고 …지금 문제되는 내용에서 피고인 상호간에 주고받은 문자메시지 이런것들이 과연 어런 심리에서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냐 , 그런데 그 지금 증인으로 나와서 불러야되겠다는 배상면?교수는 어떤 문제가 있냐면 이미 피고인측이 접촉한 사람이에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증언이 오염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채택할수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검찰측 의견 들어보고 만약 채택 피요성이 있으면 분석관이 대검에서 운영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검찰측 프로파일러를 내세워서 피고인측이 주장하고자하느 내용들이 검찰측이 알고있는 전문 프로파일러 지식 범위내에서 동일한 결과에 이르는것인지를 검토할 기회를 드리려고하는겁니다. 어느 사람이 거짓말하느냐가 부딪히는데 검찰에서 수사하면서 프로파일러 심리분석이라든지 심리분석 한바 있습니까 없습니까

검 없습니다

재 :이유가 뭐죠

검 사이코패스랄지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범행 자백하는 유서와 같은 문자랄지 객관적 자료로 입증되기 때문에

재 추가로 심리할 필요서이 없었다는거지요 장황하게 백페이지 넘는 항소이유서 보충서를 다 읽었는데 검사가 주장하는 범행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취집니다 게속적으로 번복이 되어왔고 유도에 의해서 오염됐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검 : 팽&& 진술을…

재 ; 피고인측 주장중에 제일 모호한 부분이 머냐면 살인과 살인교사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인측이 주장하고싶은 것은 팽&&의 소위 강도쪽에 초점을 맞춰야되는데 왜 살인으로 가냐느 부분인거 같아요 강도를 할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오억이천차용증에 대해서도 다시 기소댔죠? 피고인은 오억이천을 받았다는겁니까 안받았다는겁니까 피고인의 법정증거는 받았다고 하면 불리한 진술이니까 안하셔도 되는데 언뜻 보면 차용증에 오억이천만원 빼고 백지 차용증은 인정한걸로 돼있어요 오억이천을 받았다는건지 안받았다는건지 그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재판장이 이 사건 해겨하는데 피고인 주장하는 내용은 범행동기가 없다. 살인교사할 이유가 뭐가있느냐 이런얘기고 김형식 피고인이 주장하고싶은 것은 패용찬 피고인에게 한적은 있지만 죽여달라는 요구는 한적이 없고 자기가 강도범행했을지 모르지만 피고인하고 상관없다는 취지잖앙요? 공교롭게도 차용증부분은 문제가 되요. 경우에 따라 피고인이 그렇다면 사인의교사가 아니라 강도의 교사가 될수는 있어요 기록을 읽어보면 검찰측 살인을 교사했다고 하고 전기충격기와 손도끼를 범행도구로 썼다고 했죠. 칼이나 그런건 소지하지 않았어요 검사가 주장하는 것은 우연히 우발적으로 나간 것이 아니고 게획적으로 그날 살해하기 위해서 팽&&이 들어간 것으로 정리가 돼있습닏. 그러면 지금 여기 공판관여 검사 입장에서 여러 살인사건 해봤을텐데 소위 킬러가 살인 청부를 받아서 살해하는데 전기충격기와 손도끼가 살해의 도구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겁니까?

검 3월이면 추울때라서 칼같은…전문가가 아니면 찔러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재 만약 살해할 의사로 손도끼 준비한것이라면 저하하는 과정에서라도 말로 내비쳐야되는데 손도끼 뭉툭한 부분으로 내리쳤다면서요

검 첫 번째로 사람을 날로 내리치면 뇌가 …뇌수라든지 피가 난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주를 …

재 그래서 그 부분이 재판장이 보다가 피고인이 억울하다고 밝히는 상황에서 범행도구의 사용등이 선뜻 납득이 안가요. 지금 전적으로 피고인이 감??는 내용들이 합리적 의심없이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프로파일로 요청하면서 지금 검사가 얘기하는데로 범행동기와 그다음 범행도구의 사용 등이 검사가 얘끼하는바와 같이 사람을 죽일려고하는데 오히려 하더라도 칼이 쉽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왜 칼은 배제하고 손도끼를 범행도구를 했을까 물론 팽&& 피고인은 범행도구를 피고인으로부터 받았다 그랬죠? 오늘 장황하게 증인신문이 될거에요 보고 오늘 법정에 배 교수가 나와있습니까? 지금 선정을 안합니다 오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대측의 증인하고 같이 들을거에요. 왜냐면 재판장이 잘 모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그래서 오늘 채택은 보류하고 오늘 팽&& 증언 다 들어보고 거기서 검사 주장하느바같이 심리분석이나 지술분석하지 않더라도 정리되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고 추가로 증인신청에 대해서 오늘 공방에 대해서 뭔가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면 정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팽&& 증인 나오라고 하시죠 앞서서 항소이유 보충서 보셨죠?

#2;16팽 출석

재 순봉빌딩의 용도변경관련한 그 청탁이 있었다는 부분은 범죄 날짜에 의해서 당시까지는 만약 용도변경을 유지하고자했다면 안되는걸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피해자가 김형식에게 돈을 줬다 하더라도 왜 자신한테 돈을 받고 청탁을 이행하지 않냐는 취지로 강서구청장 열람공고랄지 서류들을 쭉 낸겁니다 그 전에 다아시는 내용이죠? …..빌딩 용도변경안하고 대해서는 범행교사 시점에서 대체 살인을 하라는 교사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일단 잘 보시구요

검 저희가 일심에서 …

재 추진한게 중요한게 아니라 그때까지는 용도변경이 안된다는 내용이기 때문에 안된따는 거기 때문에 청탁을 하면 업무를 추진하면 되는것이지 마치 그것이 안된다는게 전제가 되고 피해자로서는 자신이 청탁한 돈의 대가 잃었다는 피고인에 대한 배신감을 느껴서 협박하거나 원망조로 할게 아니다, 게속 하면 되지. 검사가 보시고 정리를 해달라는 취집니다. 팽&& 피고인 앉으세요 오늘은 피고인에 대한 부분에서 ..피고인은 피고인 지위에 없습니다. 증인심문이 이뤄질 것이고 다만 피고인이 여전히 자신의 혀사사건이 게류된 관게로 진술 자체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어요 그래서 피고인에게 전체적으로 진술 거부할수도 있고 개개로 진술거부할수도 있습니다 허위진술할 경우에는 본인의 형사사건에 관계된 것이긴 하지만 위증죄로 처벌받게 됩니다

#변호인단 팽의 이상행동 추궁

팽 용도변경 전혀 몰랐고요 그걸 …제가 물어봤습니다..

변(세번째)용도변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고 5회 피신에서 땅이 안풀리는게 있는데 그전까지는 당이 안풀린다 말안하다가 5회 피신에 갑자기 용도변경에 대해서 언급한 이유가 뭡니까

팽 사람이 기억안나다가 조사 받다보면 기억이 나듯이 … 형식이에게 물어봤더니 부탁을 받았더니 해결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

변 땅에 대해서 부탁을 받았는데 해결할 수 없다고는 이야기를 들었다구요?

변 요지는 경찰 조사를 여러번 받았는데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면 경찰 조사 초기에 했을것같은데 다섯 번 받은뒤 이야기를해서 비로소 그때 등장하나 그래서 여쭙는겁니다

팽 정확한건 모르겠는데 조서 꾸미다가…제가 일일이 기억을 다

변 추가 해서 묻겠습니다. 경찰이 5회 조사 당시가 망인의 유족인 송명수가 용도변경에 관련된 이야기를 처음하게 됍니다. 용도변경이야기를 했기에 경찰에 전해듣고 한게 아닌가

팽 아닙니다

변 증인은 언제 어디에서 피고인으로서 용도변경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까

팽 그건 기억이 잘 안납니다

변 검찰 진술할때는 13년 연말이라고 진술하셨는데 기억이 안나나요

팽 정확히 기억이 잘 안납니다

변 13년 연말이라고 진술했을때는 뭘 근거로 진술한건가요

팽 조사받다보다 떠올라서

변 저희가 여쭙는것이 용도변경이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시니까

팽 저는 용도변경이 뭔지 잘 몰랐습니다 땅이

변 땅문제가 왜 주

팽 왜 죽여야하느냐 자기가그런 부탁을 받았었고 그 사람은 마로해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해서

변 땅문제가 검찰에서는 13년 연말…에 땅 문제 들었다고 진술한거는 기억이 난게 아닌고

팽 그 이야기를 하니까 제가 이야기한겁니다

변 12년경 피고인으로부터 죽이라는 말 들었을 때 차용증관련 말 이외에 땅 말은 드지 못했다는거죠?

팽 그렇죠

변 증인은 13년 말 경에는 피고인의 교사 강도가 심해지고 증인이 이런저런 핑계로 범행 미루면 심하게 화를 내고 짜증낸다고 진술

팽 네

변 피고인 살인교사에 응낙하고 독촉받는 시점에야 사인교사의 이유를 알려주었다는 것입니까

팽 그렇죠

변 그때 땅에 관한 이야기를 ..그러면 피고인은 증인에게 피해자에게 5억 채무를 부담하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해준적이 있습니까

팽 없습니다

재 오다시일항관련해서 12년경에 피고인으로부터 처음 죽여다라고했을 때 차용증에 관한 말은 드르셨다는 거죠?

팽 돈을 빌렸다는 말

재 돈을 빌려서 차용증을 찾아오라는 겁니까 죽이고 찾아오라고 한 것이다?

팽 네

재 그럼 7항관련해서 채무를 그 차증 채무를 부담하게 된 이유를 그때 설명안했다는겁니까

팽 네

재 게속 독촉하면서 그때야 비로소 차용증에 대한 채무를 지게된 이유를 들면서 설명한거다

팽 네

재 어떻게 보면 증인입장에서 보면 궁금했을거같아요

팽 궁금했죠

재 오억 때문에 증인은 왜 그러냐고 묻지않았나요?

팽 지금 당장 화가 나있으니까 ..저보다 우월하고 시간이 가면 좋게 될줄알았는데 해라 못하겠다 …강압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대체 왜그러냐 그랬더니 이야기해도 모른다 너는 . 어떻게 보면 제가 못난놈이죠.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짤라버렸ㅇ니까.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을 안해줬습니다

변 피고인이 그전에는 채무에 대해 말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야기했잔습니까 갑자기 속사정에 대해 이야기한건데 …

팽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뵙고 해결방법 찾아보자 했더니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해라

변 어떤 게기가 있…저의 질문에서 땅문제도 이야기가 나왔는데 게기가 있었냐는게 저희 질문

팽 이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야기 들었을 때 친구가 곧이 곧대로 듣진 안을것아닙니까 도움도 받았고 하니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괴롭힘당할 때 죽이라했을 때 시켜서 하는사람은 없을겁니다 그 상황에서 게속 제가 변명을 하고 시간 지나면 없어지겠지. 가면 갈수록 압박이 심해지니가. 어떻게 게속 그러냐그러면 시키면 시킨대로

재 피고인에게 돈받은건 상관없이 차용증 써준건 있쬬 작성 날짜

김 211년 12월경?

재 11년 12월경이 작서일인것입니까? 증인은 피고인이 돈을 차용하고 차용증써줬다고 하느데 차용증 써줄 때 돈을 얼마를 빌리셨다는 겁니까

김 울먹

재 차용증이라느 말이 실제로 돈을 얼마를 빌렸나고 묻는겁니까

김 안

재 안빌리고 차용증만 써준 것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가죠

변 저희가 종전에 미루니까 살인교사 방법도 심해지고 심하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냈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피고인하고 증인하고 이야기했다는건가요? 뭣 때문에 하라?

팽 그렇죠

변 땅문제에 관한 말을 듣고 왜 풀수가 없는지 안물어봤습니까

팽 안물어봤습니다

변 살인교사에 대해서 어떻게 자세한건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왜 사람을 죽여야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셨습니까

패 친구의 이야기였구요 처음엔 정말 농담인줄 알았구요 시간이 그 이야기나온게 ;12년인데 그때 바로 했었겠죠 근데 지나다보니까 친구니까 오랜시간 알고지내면서 시간이 지나면 잘해결되겠지라느 안일한 생각도 했었구요 변호사님 말씀하신대로 궁금해서 물어본거는 게속 물어봤죠 알거없다고 짜라버리니까

변 다른거도 아니고 중대범죄중에 하나고 단순히 증인이 피고인하고 잘 아는 사이라도 이유도 모르는데 이레적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

팽 그래서바로 한게 아니고 이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잠잠하다 그 이야기 나오고

변 범행직전에 살인 마음을 먹었자나요 왜 이유르 묻지 않았나요

팽 힘들다 보니까 자포자기한거도 있고 형식이는 마다하면 정리하라는 것도 있고 저도 힘드니까 자포자기한 상태였습니다

변 풀 수 없는 땅이라는 것느 강서스포렉스인가…

팽 저는 그부분은 모르겠

뼌 무슨따을 풀수있는지 모른다고 하셨죠? 증인의 경찰 5회 진술에서 경찰에서 순봉빌딩이라고 하셨어요.

팽 저는 빌딩이름 자체도 잘 몰랐습니다

변 정치인 김형식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친구로서 볼 때

팽 그거는 생각안해봤습니다. 저보다 우월한 친구구나

변 우얼하다는 게무슨뜻입니

팽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변 증인은 2010년경 또는 그이전에 지인들 동원하고 금전적으로 피고인에게 도움준 사실이 있으시죠? 피고인이 청부살인 업자 구해달라고했을 때 피고인으로부터 살인교사 받은 이유부더는 자신에게 살인 강요하는 피고인이 달라보이지 않았습니까?

패 달라 보였는데 어쩔수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제가 하다 안되다 보니까 의존성이 형식에게 강해졌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변 오억원의 빚 때문에 사람을 죽이겠다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거에 대해서 증인은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팽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변 혐오감?

팽 그런거 없었

변 존경하고 자랑스럽다고도 했습니다 게속 사람죽이라는것에 대해서 증인은 실망한 부분도 있

팽 시간이 지나면…

변 실망했을 것도 같은데 증인의 삶을 희생하면서 살인교사에 응했다는겁니까?

팽 네

변 검찰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저으로 의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말

팽 저보다 우월하고 시의원도하고 제 주위에 존경심이라고도 할수있겠죠

변 평소 존댓말로 대화하셨습니까

팽 그런거 아닙

변 뒤에서 걸어갔습니까

팽 같이걸을때도 있고 뒤에 걸을때도 있고

변 존경해서 의존한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삶을 담보할정도로 정신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든지 생명의 구원이라든지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살인을 한건데 특벼란 이유가 있었습니까

팽 지내다 보니까

변 잘나가는 친구니까 폼도 나고 ..

재 그런식으로 질문하면 12시까지 할거같네요

변 정신적으로 종속이 되어있다는 것이지요

팽 네

변 환전 투자금 오천만원의 빚?

팽 네

변 공증까지 했었지요?

팽 오천만원….네

변 공증이 되어있는…

팽 네

변 오천만원의 빚은 투자금이라 받지 않아도되낟고 하는..그래서 정신적으로 종속이 된것인가요

팽 그런점도 있겠죠

변 친구이니까 부패하고 살인도 저질러도….

재 생략…

변 결구 증인이 마음 변한게기는 피고인이 살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자살만 강요해서인가요

팽 네

변 13년말부터 살인안한다고 짜증도 나고 반발심?

팽 반발심이 생겼죠

변 이건아니다 등의 말이 살인거부하는 말이라고 진술하셨습니다 증인은 살인교사 받아들이면서 피해자를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팽 죽여야겠다고 가는건 아니지않습니까 하다보니 그렇게됐습니다

변 살인을 부탁받았는데 그건 아니다

팽 망설이다가 …마음을 먹은거죠

변 어떻게 마음을 먹은

팽 살해해야겠다고 망음을 먹은거죠

변 결국 친한 친구 부탁이지만 만류하거나 설득하고 아니며 경찰에 신고하느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느 …대안은 생각안했습니까

팽 생각은 했습니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팽-김의 이상한 돈거래

변 2010년 선거를 도와준 이후에 피고인과 연락하면서 지냈죠? 게속 친구관계유지?돈은 어떻게 갚았습니까? 게좌이체?

팽 기억안나

변 증인은 환전소 자금 오천만원에 대해서 매달 백만원을 주었습브니까

팽 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

변 결국 증인과 피고인은 살인교사 부탁받기 이전에도 돈문제 정화히 게산하는 사이는 아니라고 보이는데 맞죠?

팽 네

변 피고인 직접 만나서 현찰로 갚은적있ㄴ요

팽 오래돼서 기억안납니다

변 받은존돈준중 산당수는 갚지 않아도되는 돈이라고 진술?

팽 네

변 변제에 대한 독촉을 받은적도 아니라고 진술?

팽 네

변 13년 4월경부터 경제적으로부터 어려워지자 이주현에게도 빌리기도하고 피고인에게도 빌리기도?

팽 네

변 천삼백원을 증인 아버지 보증금 명목으로 빌렸죠?

팽 네. 형식이가 천삼백만원.

변 보증금에 필요한 돈을 삼일만에 나눠 출금?보증금으로 쓰인게 맞습니까?

팽 네

변 증인은 12녀이후 14년일월경에도 피고인에게 가방 등 밀수명목으로 돈 빌린적 있고 갚끼위한거라고 진술?

팽 네

변 칠천만원 갚아라 한적있어?

팽 네

변 차용증 이행각서 오천만원에 대해서 갚으라고한적 없지요?

팽 네

변 칠천만원보다 오천만원 일억이천만원이 증인에게 더 압박으로 다가올거 같은데 피고인이 오천만원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멉니까

팽 실행하지 않고 미루니까 형식이가 그걸로 압박한겁니다

변 증인은 검찰 피신을 마치고 선거자금을 했다고 진술한적 있죠?

팽 기억안나

변 선거자금을 대준건 맞습니까

팽 기억이 안난다니까요

변 약 이천만원 지원한 사실?

팽 차…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 금액이

변 방금 피고인으로서는 선거과정에서 무형적으로 도움주었고 당선됐기 때문에 수시로 돈을 빌려주거나 하는게 이상한거 아니었네요?

#팽의 이상한 증언

변 김형식이 ….검찰에서 이층에서 살았아고 …피고인이 증인을 속인겁니까. 집앞 공원에서 만나적 있으시죠?

팽 네…이층에 산다는거를 왜 알았냐면 형식ㅇ혼자 작업하러간다면서 로프를 타고 내려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이층집인줄 알았습니다

변 범행도구 건네받은 게 14년 1월경

팽 네

변 피고인이 때 범행도구 건네받은때 얼마 전화받고 강서구에 도착?

팽 기억안나. 새벽이었습니다. 자정쯤

변 증인은 자기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거죠?

팽 네

변 이층짜리 아파트에서 밧줄 타고 내려오면 외부인에게 눈에 띌거 같은데 어떻습니까

팽 껀 저도

변 십삼층에서 피고인이 밧줄타고 내려왔다고 굳이 말한이유는

팽 자기는 로프타고 내려왔기 때문에 상관없다 몇층인데 물어봤더니 이층이라고 하더라고요

변 증인은 그때 손도끼와 전기충격기를 건네받으셨죠?

팽 네

변 그걸로 뭘했습니까

팽 가방에 보관했습니다

변 가방에 어디에 보관했습니까

팽 지인 피시방

변 손도끼와 전기충격기를 범행도구로 저한게 …

팽 저한테 무기가 없었습니다. 형식이가 나혼자 할테니까 나오라고 한날 주차타워에서 만나난날 배낭을 메고 있었구요 주차타워 일층에서 건물 바라보면 사무실이 보입니다 사람이 왔다갔다하는게 저도 알았다하면서 거기서 만났었습니다 형식이가 시ㅣ티비 없는 …

변 손도끼와 전기충격기를 범행도구로 정한건 누구

팽 건네받았다니까요

변 손독끼와 전기충격기로 어떻게 살해하려고 생각?

팽 그냥 뒷부분으로

변 누가 그렇게

팽 제가 혼자

변 뒷부분으로 때리기로 살해하려고 생각하셨단 말씀이시죠

팽 네

변 증인이 보실 때 손도끼말고 칼이나 다른 범행도구

팽 칼달라니까 안주더라구요

변 살인 실행할 사람이 칼을 안줄 이유가 있었습니까

팽 안주더라구요

변 본인이 사서할수도 있었잔습니까

팽 죽이러갔었어도 …거기서 안들키면 나는 수사선상에 오를리 없으니까 너는 무조건 걸리지만않으면 된다는게 뇌리에 박혀있었으니까요

#김의 부도덕

재 피고인 피해자가 매일 장보 적는 장면을 목격한사실이 있습니까.

김 제가 본거는 검찰이

재 장부를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까

김 없습니다

재 피고인은 장부를 갖고있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있습

김 뒷부분을 보여준 적이 과거에 있었

재 금전출납장부를 보여줄 이유가 잇습니까

김 늘상 놓고 쓰시고 있었구요 한번 매일기록부가 책상에 펴져있는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얼핏하신적이

재 금전등 장부는 비밀스러운 거자나요 어떤 이유에서 피해자가 피고이넨게 장부를 보여주었는지 확인하려고하는 겁니다 쓰는 사실을 목격하더라도 피고인으로서는 ㅇ떤 사실을 기재하는지 알수가 없자나요 장부가 금전출납에 대하 장부라는 사실을 피고인이 어떤 이유로

김 펴져있는 상태에서 다른 면을 한번 본건 뿐이구요

재 장부를 펼쳐놓고 기재하고 있었다는

김 방문했을 때 옆에 놓고 대화를 나눈 저기

변 피해자의 만남이 기록되지 않는데 증인의 말대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만나기로한 것은 사실입니까?

팽 그건 모르죠

변 14. 2.24에 용기없었다고하는데 3.3 용기를 낸 원동력은 무엇

팽 너무 무기력해졌고요 그리고 너무 채무관계가 많았고요 힘들었고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해야겠다 믿었던 형식이가 알아서안해주겠나하는 막연한

#재판장, 김 의원에게 이상한 쪽지 추궁

재 몇가지로 직권으로 물어보겠습니다 항소이유 보충서 ….유력한 유죄의 증거가 피고인들이 이 사거으로 유치장으로 수감돼서 피고인이 증인에게 보냈다는 쪽지 세장의 문제가 발행해서 유죄의 증거로 상요된거 같아요 근데 재판장이 봤을 때 족지에 대해서 피고인이 합리적 설명을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

변 검찰에서 .. 그부분에서 피고인 신문단게에서 해명을 할…

재 피고인심문할 때 증인은 퇴정시켜야되기 때문에… 쪽지 세장만 준비해주실래요? 첫 번째 쪽지부분 올려놔주십시오. 피고인이 증인한테 첫 번째 보낸 쪽지요 수도없이 적었다 지웠다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라도 …니 와이프 운운하면 욕한건 진심이 아니었다 .더적으면 안될거같아서 할말 맣아서 못적겠다, 그래도 친구 얼굴보니 좋다, 고 적었어요. 미안하다 사고한다 오이프르 욕을 했다 진심이 아니었다 그만적는다, 요 쪽지가 왜 김형식이 보낸건가요?

팽 저 메모를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고요 내 생각에 시켜서 미안하다고 한건지 와이프에게 욕을 하고 ..저 쪽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재 왜 저 쪽지를 보냈냐고요

팽 몰랐습니다 전후사정…쪽지만 날라왔던겁니다

재 같이 잡혀온줄 모른 상태에서 쪽지받았는데 피고인과 피고인과 증인 사이에 와이프 욕한거를 가지고 다툰 내용이 없어서 와이프 운운 욕한건 정말 잘못했다 이 부분은 이해할 수 없고 피고인이 왜 이런 쪽지를 보냈는지 그 내용조차 이해를 못하였다 맞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팽 시켜서 미안해서

재 이 사건 교사한거 때문에 증인하고 같이 구속되자 증인한테 미않나 감정 표현하기 위해서 이 사건 쪽지를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겁니까

팽 네

재 쪽지 이번이 이렇습니다. 친구야 ….이제 헤어져 하나만 ….넌 원래 살해의도가 없었다고 했자나 그래서 바대쪽으로 때렸다고 했거든 이 후의 상황이 아무리 많으 ㄴ일이 있어도 그날 무엇을 해쓰냐 의도가 있었느냐 이점을 잊지마라 함정수사 말 들었다 반드시 묵비권 행사하래 재판정가서 얘기하란다 그게 큰 도움이 될… 넌 쉽겠다 할 얘기다했다며 이런 쪽지 받은적있죠

팽 네

재 왜 받았습니까

팽 형식이랑 제가 나눴던 얘깁니다. 고인 살해한다음에 부천에서 ㅐ가 형식이한테 돌아가셨냐 물어보니 죽었다고 도끼 뒷날로 때렸는데 그 얘기를 했던겁니다 그리고 의도를 이야기하라면서 쪽지를 보낸ㄴ겁니다

재 쪽지 세 번째 꼭 기억해라 함정수사 통화 녹취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도 할 수 없다 지금 증거는 내가 얘기해준 미선씨 주현이형 진술뿐이ㅑ 무조건 묵비권 반성이 부족하다는건데 의도성 유무다. 재판정 수사기록….녹취록 얘기도 못꺼냈다. 저들이 가진 증거는 네 진술뿐이야 이런 쪽지를 받았

팽 네

재 쪽이 내용은 왜 받게된겁니까 언제

팽 거짓말하길래 교도관하고 너랑 통화한 내용이 녹취돼있다고 하고 무조건 묵비를 하라는거죠

재 피고인에게 묻습니다 피고인입장에서 증인이 허위진술을 해서 자기스스로 강도범행을 저지르고 피고인에게 뒤집어씌운거라면 매우 억울한 일로 들어가게 된거에요 그런 상태에서 쪽지내용이 원망하는투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오히려 부족한 법률 지식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쪽지 보낸 이유와 왜 그런 내용을 썼는지

김형 6.24 체포됐고 ??? 구속영장 27일 일심 변호사가 강서유치장에서 세가지. 첫째 니가 잘못산 벌이다 회개하고 두 번째 국정원 세 번째 넌 앞으로 묵비권 행사하고 갔는데 제가 묵비권 부분은 파단을 못해서 평소 온건한 성향의 강서경찰서 고문 변호사 김종무 변호사를뵙자고 청해서 28일 토요일 오후 늦게 집엣 쉬던 김 변호사가 강서경찰서에 와주셨습니다 절대로 묵비하지 말라고 차분히 설명하던 주에 이연호 경장이 박차고 들어와서 김 변호사를 끌고나갔습니다 저로서는 전혀 영문을 몰랐지만 굉장히 묵비권 행사해야되는구나 국정원이 움직이는구나 나도 나오겠구나 빌어야되는구나 라는 판단이 토요일날 잠못자고 일요일날 쓰게된 겁니다

재 친구라 말하자면 말도안되는 모함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친구한테 너 왜 그래라고 질책하게되면 더 큰 해를 당할까봐. 증인을 미안하다고 싹싹 빌면 믿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한 취집니까

김형 네